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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별 한달살기

부모님과 제주 한 달 살기

by allthatnews0 2025. 7. 1.

매년 부모님과 짧은 여행을 다녀오곤 했다. 하지만 늘 일정은 바빴고, 사진은 많았지만 대화는 적었다. 그런 여행이 반복될수록 ‘진짜 같이 있었던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여행이 아니라, 같이 살아보면 어떨까? 그렇게 시작된 것이 ‘부모님과 제주 한 달 살기’ 프로젝트였다.

부모님과 제주한달


제주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멀지 않으면서도 일상이 가능한 환경이었고, 부모님 세대에게는 여전히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머문 곳은 제주시 외곽의 작은 마을이었고, 근처에 바닷가와 감귤밭이 있는 평화로운 동네였다. 이동보다 머무는 데 의미를 두고, 체험보다 대화를 중심에 둔 한 달이었다.
처음에는 ‘과연 이게 가능할까?’ 하는 의심도 있었지만, 실제로 함께 지내보니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놓친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매일 함께 식사하고 산책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아주 단순한 순간들이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여행객’이 아닌 ‘가족’으로 다시 연결되기 시작했다.

 

한 달 살기로 몰랐던 부모님의 리듬을 이해하게 되다

한 달 동안 함께 살다 보면, 부모님의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아침을 일찍 준비하는 습관, 텔레비전을 보며 따라 웃는 모습, 고요한 오후에 마당을 바라보는 시선 같은 것들이 전에는 미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늘 부모님이 나에게 맞춰주기만 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내가 부모님의 속도에 귀 기울인 적은 거의 없었다.
제주에서의 생활은 빠르지 않았다. 마트 대신 오일장을 찾고, 택시 대신 마을버스를 탔다. 늦은 오후엔 바닷가 벤치에 나란히 앉아 바람 소리를 들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서로의 말에 집중하는 일이 처음엔 낯설었지만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어느 날 저녁, 함께 감자전을 부치다 아버지가 조용히 말했다. “너랑 이렇게 매일 밥 해먹는 게 참 오랜만이다.” 그 말 한마디에 나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바쁜 도시에서 놓쳤던 대화들이 제주에서 천천히 피어올랐다. 서로에 대해 새로이 알게 되는 일들이 많았다. 어떤 건 놀라웠고, 어떤 건 부끄러웠지만, 그 모두가 가족이라는 감정의 뿌리를 더 깊게 해주었다.

 

세대 차이가 아니라 삶의 결이 다를 뿐이었다

한 공간에서 부모님과 장시간 지낸다는 건 마냥 따뜻한 일만은 아니었다. 서로 다른 세대가 모이면 당연히 관점도 다르고, 생활 방식도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침에 커피를 마셔야 하루가 시작됐고, 부모님은 된장국 냄새가 나야 마음이 편했다. 나는 산책 중에도 이어폰을 끼고 싶었고, 부모님은 자연 소리를 그대로 듣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한 달 동안 천천히 서로를 관찰하면서, 이 차이들이 틀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삶의 패턴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됐다. 대화를 나누며 상대를 바꾸려 하지 않자, 자연스럽게 이해와 존중이 생겨났다. 그렇게 세대 간의 간격은 점점 줄어들었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특히 음식과 관련된 일은 서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는 부모님의 방식대로 밥상을 차려봤고, 부모님은 내가 만든 간단한 샐러드를 “생소하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작은 식탁 위에서 세대가 공존하는 방식이 생겼고, 그 공존은 하루하루를 따뜻하게 이어주는 힘이 되었다.

 

함께 산다는 건, 서로의 기억이 되어준다는 것

한 달이 흐르고, 우리는 다시 각자의 도시로 돌아왔다. 짐을 싸면서 부모님은 “시간 참 빨리 가더라”라고 했고, 나는 웃으며 “다음엔 봄에 오자”고 말했다. 그 말 속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제주에서의 한 달은 일상을 멈춘 휴식이 아니었다. 함께 살아보며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기억에 남을 시간을 만들어간 과정이었다.
이제 나는 여행 사진보다 함께 만든 된장찌개 맛을 더 생생하게 기억한다. 관광지보다 동네 개와 눈을 맞췄던 순간이 더 선명하다. 부모님과 함께한 한달살기는 그 어떤 여행보다 의미 있었다. 그건 단지 오래 함께 있었다는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서로의 일상에 스며들 수 있었던 귀중한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시 제주에 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한 달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단지 과거의 추억으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의 관계에도 따뜻한 여운으로 남을 것이다. 가족이란 매일 마주치는 사이지만, 같이 살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면이 분명 존재한다. 제주에서의 한 달은 그 숨겨진 부분을 조심스럽게 밝혀주는 시간이었고, 그 시간은 이제 우리 모두의 기억이 되었다.

 

한 달 살기에서 나누는 대화가 마음을 열었다

제주의 해안도로는 조용하고 평평해서 부모님과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길이었다. 하루에 한 번은 꼭 바닷가를 걷기로 했고, 처음 며칠은 말없이 걷기만 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걷는 시간은 자연스럽게 대화의 시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대단한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었다. 오늘 반찬이 어땠는지, 마을에 사는 개가 귀엽다든지, 어제보다 바람이 덜 부는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소소한 대화 속에서 나는 부모님의 말투에 숨어 있던 감정을 조금씩 읽게 되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문득 말했다. “예전엔 너랑 단둘이 길을 걷는 일이 거의 없었지.” 그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우리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마주 앉을 시간이 거의 없었고, 마주 앉는다 해도 늘 TV나 스마트폰에 시선이 뺏겨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어떤 방해도 없이 오직 서로의 걸음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부모님과 함께 걸으면서, 나는 관계가 가까워지는 방식은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는 걸 배웠다. 그저 함께 같은 방향으로 천천히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문은 조금씩 열린다. 그런 시간이 반복되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기분을 알 수 있게 되고, 대화하지 않아도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 제주에서의 이 산책 시간은 부모님과의 관계를 단단히 이어준 보이지 않는 끈이 되어주었다. 그 끈은 일상으로 돌아온 후에도 내 마음 한쪽에 여전히 조용히 이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