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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별 한달살기

필리핀 바기오 한 달 살기

by allthatnews0 2025. 7. 1.

무더위가 반복되는 7월 초, 나는 익숙한 일상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목적지는 가까우면서도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고, 무엇보다 ‘덥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이 있었다. 그렇게 찾게 된 도시가 필리핀 북부 고산지대에 위치한 ‘바기오’였다. 이곳은 해발 1,500미터가 넘는 위치에 자리해 있어 필리핀에서도 흔치 않게 서늘한 날씨를 자랑한다. 도착하자마자 느낀 첫 인상은, 낯선 나라에서 한여름에도 긴 소매가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필리핀 바기오 한달살기


공항에서 몇 시간을 차로 이동한 끝에 도착한 바기오 시내는 서울의 도심과는 완전히 다른 리듬을 품고 있었다. 고층 건물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대부분의 상점은 간판 대신 손글씨로 이름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 도시의 분위기는 화려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았다. 대신 잔잔하고 단정했다.
나는 이 도시에서 단순히 지내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시간과 감정이 조금씩 회복되는 느낌을 직접 경험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실험은 바기오라는 도시의 기후, 분위기, 사람들에 의해 서서히 완성되기 시작했다.

 

한 달 살기 동안 영어는 책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배워야 했다

바기오를 선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영어 학습이었다. 이 도시에는 오래전부터 영어 교육 중심지가 형성되어 있었고, 외국인 학생과 유학생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기존의 어학원 커리큘럼이 아닌, 생활 중심의 회화 경험을 원했다. 그래서 현지 튜터와 직접 계약을 맺고, 일상 속에서 영어를 배우는 방식을 선택했다.
수업은 정해진 시간표가 없었고, 장소도 매번 달랐다. 어떤 날은 커피숍에서 메뉴판을 읽으며 대화를 시작했고, 또 어떤 날은 재래시장에서 생선을 고르며 단어를 익혔다. 이 방식은 문법보다는 맥락을 이해하게 했고, 말하기에 대한 두려움을 서서히 줄여주었다. 영어를 잘하려는 목표보다는 자연스럽게 반응하고 의미를 전달하려는 자세가 훨씬 중요했다는 걸 그제야 실감했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도 나의 영어는 계속되고 있었다. 숙소 주인과의 짧은 대화, 택시 기사와 나눈 날씨 이야기, 슈퍼에서 물건을 찾으며 묻는 질문 하나까지도 모두 ‘학습’이었다. 책상 앞에서 외운 단어보다, 내가 고른 감자 하나에 얹힌 실용 표현 하나가 더 오래 남았다.

 

낯선 도시의 리듬에 나를 맞추며 새로워진 한달살기

바기오에서 보내는 날들은 반복적이면서도 단조롭지 않았다. 아침에는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떴고, 바람은 항상 일정한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알람 없이 일어났고, 첫 일정은 슈퍼에 가는 것이거나, 근처 카페에서 천천히 커피를 마시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은 하루를 보내면서도, 내 마음은 점점 가벼워지고 있었다.
이 도시의 가장 큰 특징은 빠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한국에서는 분 단위로 조급하게 움직였던 내가, 여기에서는 시계를 보지 않고도 흐름에 몸을 맡길 수 있었다. 택시가 늦게 와도 화가 나지 않았고, 음식이 늦게 나와도 오히려 반가웠다. 그 기다림 속에서 처음으로 ‘시간이 멈춘 느낌’을 경험했다.
밤에는 책을 읽거나, 일기를 손글씨로 적었다. 와이파이가 약해서 동영상은 자주 끊겼지만, 오히려 그 느린 속도가 나를 조용히 만들어주었다. 바기오에서는 느린 것이 잘못이 아니었고, 조용한 하루는 결코 지루하지 않았다. 그것은 내 마음을 다시 정돈해주는 시간이었고, 내 안의 복잡한 생각들이 하나씩 가라앉는 과정이었다.

 

떠나는 순간까지 이어졌던 익숙하지 않은 평온함

한 달이 지나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복잡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했다. 스마트폰을 다시 켜고 쏟아지는 알림들을 확인하면서도, 그것들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는 감각이 생겨 있었다.
바기오에서 경험한 한 달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 ‘삶’이라는 단어를 다시 이해하는 시간이었고, 내가 무엇에 민감하고, 어떤 감정에 자주 휘둘리는지를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었던 기회였다. 기후가 선물해준 시원한 공기, 사람들과 나눈 소소한 대화, 낯선 공간 속의 느린 루틴. 이 모든 것들은 하나로 모여, 내 안에 작지만 단단한 변화를 남겼다.
지금도 나는 하루에 한 번씩 바기오에서 보냈던 조용한 아침을 떠올린다. 커피 한 잔, 적당한 고요함, 시끄럽지 않은 바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을 걸 수 있었던 그 순간. 다시 그곳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 도시가 내 삶에 새긴 감정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바기오는 내가 떠나온 도시가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는 방식의 하나가 되었다.

 

익숙한 불편함보다 낯선 여유를 선택하는 용기

바기오에 머무는 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불편함'을 마주해야 했다. 강한 와이파이를 찾기 어려웠고, 가끔은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았으며, 도시의 교통체계는 예상보다 단순하고 느렸다. 하지만 그 모든 불편은 시간이 지나면서 ‘불필요한 기대’였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은 것에 당연함을 부여하며 살고 있었다. 속도, 편리함, 연결, 알림, 효율 같은 단어들이 내 삶의 중심이 되어 있었고, 그 틀 안에서 벗어난 것을 불편하다고 판단했을 뿐이었다.
바기오의 삶은 그 모든 기준을 천천히 무너뜨렸다. 택시가 제시간에 오지 않아도, 음식이 30분 늦게 나와도, 사람들은 누구 하나 화내지 않았다. 그 여유로움 속에서 나는 불편함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불편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본래는 선택의 여지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선택한 이 도시에서의 한 달은, 단순히 기후가 시원해서 좋았다는 말로 설명되기 어렵다. 그것은 나의 일상적인 습관을 하나하나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여유는 어디에든 존재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준비되지 않으면 결코 체감할 수 없다는 걸 배웠다. 바기오는 내게 익숙한 불편함을 버리고, 낯선 여유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키워준 장소였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내 삶의 방향을 바꾸는 작은 기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