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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별 한달살기

주방 없는 숙소에서 한 달 살기

by allthatnews0 2025. 7. 3.

여행을 할 때 ‘주방이 꼭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당연하게 생각하던 나에게, 이번 한 달 살기는 전혀 다른 실험이었다. 우연히 예약한 숙소에는 냉장고 하나, 전자레인지조차 없었다. 처음에는 당황했다. 간단한 요리도 못 하고, 물조차 데울 수 없는 구조는 하루 이틀 지내기에는 괜찮지만, 30일을 오롯이 살아가기에는 꽤나 제한적인 환경이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외식만으로 한 달을 살아보면 어떨까?"

주방 없는 숙소 한달살기

 

그렇게 시작된 ‘외식 중심 한 달 살기’는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매 끼니를 밖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조건은 단순히 ‘돈이 더 들겠구나’라는 수준을 넘어서, 일상 전체의 구조를 새로 디자인해야 하는 문제로 이어졌다. 식사 시간이 되면 단순히 ‘배고프다’는 감각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무엇을 먹을 수 있을지, 얼마를 쓰게 될지, 영양 균형은 괜찮을지 등의 문제까지 고려해야 했다.
주방이 없다는 단순한 조건 하나가 내 생활 리듬 전체를 바꾸는 실험의 시작점이 된 셈이었다.

이 실험은 단순히 불편함을 감내하는 연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익숙함에서 벗어난 채, 불확실성과 매 끼니 마다 마주하는 ‘선택의 무게’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훈련이었다. 부엌이라는 ‘안전한 뒷공간’이 사라지자, 나는 매일의 식사를 더 의식적으로 대하게 되었고, 외식이라는 행위 하나에도 계획과 판단이 필요해졌다. 먹는다는 단순한 행위가 ‘삶의 결정’으로 바뀌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을 겪으며 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리듬으로 하루를 살아가기 시작했다.

 

한 달 살기 동안의 예산, 시간, 건강 – 세 박자를 맞추는 외식 전략이 필요했다

외식 중심의 한 달 살기는, 겉으로 보면 단순한 ‘편리한 선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처음 일주일 동안 나는 지출 통제의 어려움과 영양 불균형이라는 두 가지 큰 벽을 만났다. 한 끼당 평균 6천 원에서 8천 원 정도가 들었고, 하루 세 끼를 해결하려면 2만 원이 훌쩍 넘었다. 이는 한 달 예산 60만 원 이상을 의미했고, 의외로 큰 부담이었다. 무엇보다 매번 외식 메뉴가 자극적이거나 기름졌고, 속이 더부룩하거나 소화가 어려운 날도 생겼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하루 한 끼는 가장 가성비 좋은 식당에서 ‘든든하게’ 먹는다. 둘째, 나머지 두 끼는 가볍게, 예를 들어 빵 + 과일 또는 샐러드와 요거트처럼 최소 조리 음식으로 해결한다. 셋째, 음료는 되도록 숙소 근처 마트에서 물이나 과일주스를 사두고 마신다.
이 원칙을 기반으로 루틴을 짜자 외식 중심이더라도 예산과 건강을 동시에 챙길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탐색’이었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어떤 식당이 가격 대비 양이 좋은지, 어떤 곳이 채소 반찬을 많이 주는지를 기록해두었다. 이 정보는 다음 주의 식사 전략을 결정짓는 핵심 데이터가 되었다. 외식은 결국 선택의 문제였고, 그 선택이 쌓일수록 한 달의 식생활은 안정되기 시작했다.

 

현지 식문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 외식이 준 예기치 않은 선물

매 끼니를 밖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조건은 예상치 못한 장점을 안겨주었다. 나는 하루에 최소 두 번 이상 낯선 식당을 방문했고, 그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마주치며, 해당 지역의 식문화를 깊이 이해하는 기회를 얻었다. 이 경험은 주방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나라 음식을 소개해주던 현지인 주인, 반찬을 하나 더 챙겨주던 작은 식당의 직원, 현지어로 된 메뉴판을 같이 읽어주던 옆 테이블의 어르신까지. 외식은 단순히 음식 소비가 아니라 사람과 문화가 교차하는 접점이 되었다.

특히 로컬 식당에서의 식사는 내게 ‘지역성’을 더 강하게 체감하게 했다. 집에서 요리한다면 어쩔 수 없이 한국 스타일로 구성된 식단이 될 수밖에 없지만, 매 끼니를 외부에서 해결하는 구조는 해당 도시 사람들의 입맛과 식습관을 직접 내 몸에 체화하게 해주는 과정이었다.
처음엔 낯설던 향신료와 조리법이, 2주가 지나자 익숙해지고 심지어 그리워지기까지 했다. 어느 순간, 나는 식당에서 먹는 음식의 맛이 단순한 외식 메뉴가 아니라 ‘내가 사는 동네의 맛’이라는 감각으로 전환되는 경험을 했다. 외식만으로 살아가는 일상은 단절이 아닌, 깊은 몰입의 도구가 되어 있었다.

 

한 달 살기 중 불편함을 지나 일상이 되는 순간, 그때 진짜 적응이 시작된다

한 달의 외식 생활이 끝나갈 즈음, 나는 문득 ‘이제는 주방이 없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제한이었던 그 조건이 어느새 일상의 일부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식당을 하나 더 탐색하거나, 다음 날 조식을 해결할 로컬 카페의 위치를 미리 체크해두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외식 중심의 삶이 주는 가장 큰 깨달음은, 먹는 행위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삶의 구조를 재설계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고정된 루틴이 아닌 유동적인 식사 구조는, 하루를 더 의식적으로 살게 만들었고, 무심코 흘려보내던 식사 시간이 오히려 더 집중된 시간이 되었다.
식비에 있어서도 처음 한 주에 비해 마지막 주에는 오히려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나은 식사를 구성할 수 있었다. 소비가 아닌 ‘선택’ 중심의 식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이 실험을 통해 나는 단지 주방이 없는 공간에서도 살아남았다는 만족을 얻은 게 아니라, 음식을 대하는 방식 자체를 전환하는 기회를 얻었다. 더 이상 외식은 귀찮고 지출 많은 일이 아니었고, 그저 또 하나의 일상 방식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다음에 또 다른 도시에서 한 달을 살게 된다면, 나는 더 이상 주방 유무를 중요하게 따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진짜 중요한 건 음식을 준비하는 공간이 아니라, 음식을 대하는 태도라는 걸 이미 몸으로 배웠기 때문이다.